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정림사지오층석탑, 백제 건축의 완성과 전승

by 티라미숙 2025. 9. 9.

백제 사찰 건축의 변혁과 정림사지오층석탑의 공간 구조

정림사지오층석탑, 백제 건축의 완성과 전승
정림사지오층석탑, 백제 건축의 완성과 전승

 

백제의 오랜 역사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축 유산은 매우 적습니다. 특히 백제는 뛰어난 조각과 공예로 잘 알려져 있지만, 건축물 자체는 대부분 소실되거나 흔적만 남아 있어 아쉬움이 큽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여에 남아 있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백제 건축의 미학과 구조적 특징을 생생히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입니다. 정림사 절터에 우뚝 서 있는 이 석탑은 단순히 한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백제가 이룩한 공간미학의 정점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백제 사찰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는 금당 앞에 커다란 목탑을 두는 형식이었습니다. 미륵사와 같은 대사찰에서도 중심 건물 앞에 세워진 목탑은 사찰의 위용을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목탑은 그 구조적 특성상 넓은 평면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금당 앞 마당이 상대적으로 협소해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부여 군수리사지의 경우만 보더라도 금당 앞 공간과 탑의 배치 비율이 1 대 12로, 목탑이 지나치게 많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정림사지는 완전히 새로운 발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기존의 목탑 중심 배치가 아니라 석탑을 최소한의 공간에 세워 금당 앞마당의 여유를 확보했습니다. 실제로 금당 앞마당과 석탑의 면적 비율은 1 대 100에 달할 정도로 차이가 큽니다. 이로 인해 정림사 경내는 훨씬 개방적인 공간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탑 자체를 시각적 중심축으로 세우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즉, 백제는 단순히 목탑을 석탑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공간의 질서를 새롭게 설계하고 시각적 균형과 기능적 조화를 동시에 달성했습니다. 이는 백제 사찰 건축에서 큰 전환점이자 미학적 진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림사지의 배치는 탑이 단순히 건물들 사이에 놓이는 구조가 아니라 금당 앞마당의 중심에 완벽히 자리 잡도록 하였습니다. 마당의 대각선을 연결했을 때 중앙에 정확히 위치하도록 설계되어, 방문자 누구라도 절 안으로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탑을 바라보게 되는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건축 배치가 아니라 공간과 인간의 시선을 동시에 지배하는 뛰어난 건축 미학의 성취였습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단순히 종교적 신앙의 상징물이 아니라, 건축과 공간의 주도권을 동시에 장악한 백제 건축가들의 지혜와 미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석탑의 구조적 특징과 비례미학

정림사지오층석탑이 한국 건축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석탑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균형과 아름다운 비례를 통해 완성된 건축미를 보여줍니다. 기단은 비교적 낮게 조성되었으나 1층 탑신은 높게 올려져 있어 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에서 위로 확장되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나 2층부터는 급격히 너비와 높이를 줄여서 전체적인 무게감이 하층부에 집중되도록 설계했습니다. 이로 인해 보는 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1층 탑신에 머물면서도 위로 이어지는 상승감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1층 탑신의 모서리에는 약간 안쪽으로 기울어진 듯한 기둥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구조적인 보강 장치가 아니라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기 위한 세심한 설계였습니다. 또한 기둥 내부에는 두 짝의 문을 연상시키는 판석이 배치되어 있어 건축물임과 동시에 상징적 문지기 역할을 했습니다. 지붕돌은 얇고 넓게 뻗어 있으며, 끝 부분이 살짝 위로 들려 있어 경쾌하고 우아한 곡선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형태는 단순히 장식적인 효과에 그치지 않고 탑 전체의 시각적 긴장감을 완화시키면서도 하늘로 향하는 상승감을 강조했습니다.

이 석탑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시각적 효과가 아니라 철저히 수학적 비례에 근거해 있습니다. 일본 건축학자 요네다 미요지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을 실측하여 그 수리적 원리를 밝혀냈습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이 석탑은 고구려 척도로 불리는 고려척을 사용하여 설계되었으며, 그 기본 단위는 7척이었습니다. 1층 탑신과 지붕돌의 높이는 7척, 기단 높이는 그 절반인 3.5척, 기단의 너비는 10.5척으로 정확한 비례의 체계에 따라 설계된 것입니다.

특히 층별 비례에서도 1층 너비 7척에 맞추어 2층과 5층의 합이 7.2척, 3층과 4층의 합이 7척으로 거의 완벽한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높이에서도 동일하게 1층의 높이를 기준으로 2층과 5층의 합이 7척, 3층과 4층의 합이 6.9척으로 정교한 비례 체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백제 장인들의 치밀한 계산과 계획에 의해 가능했던 것입니다.

더욱 주목할 점은 이와 같은 비례 체계가 일본 나라의 호류지 오층목탑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건축물이 거의 동일한 체감비를 공유하고 있으며, 심지어 지붕돌의 끝을 연결했을 때 형성되는 이등변 삼각형의 비율까지 일치했습니다. 이는 호류지 목탑 건립에 백제 장인들이 직접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단순히 백제 건축의 정점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건축 문화의 교류와 전승을 입증하는 역사적 증거였습니다.

 

역사적 의미와 후대의 평가

정림사지오층석탑은 건축적 미학을 넘어 역사적 의미 또한 깊습니다. 이 석탑의 1층 탑신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새긴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새겨 넣은 이 글귀 때문에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오랫동안 평제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절은 불타 사라졌고, 절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발견된 기와 조각에서 ‘태평팔년술진정림사’라는 글귀가 확인되면서 이 절이 정림사였음이 밝혀졌고, 오늘날에도 이곳은 정림사터라 불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굴곡은 정림사지오층석탑의 존재를 더욱 특별하게 만듭니다. 단순히 백제의 미학을 보여주는 건축물이 아니라, 한 나라의 흥망과 동아시아 문화 교류, 그리고 후대의 역사적 인식이 모두 교차하는 상징물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오늘날까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당시 백제 장인들의 높은 건축 기술과 수학적 사고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석탑이 지닌 의미는 한국 건축사의 전통과 일본 건축의 뿌리를 연결하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호류지 목탑에 반영된 비례 체계와 구조적 유사성은 백제 건축이 일본 고대 건축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가 단순히 한반도 서남부에 국한된 왕국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중요한 주체였음을 말해줍니다.

오늘날 정림사지오층석탑은 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백제인의 건축미와 공간미학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비록 백제의 영광은 사라졌지만, 이 석탑은 그들의 미학과 정신을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백제의 미적 감각은 정림사지오층석탑을 통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이는 한국 건축사의 귀중한 자산이자 세계 건축사에서도 의미 있는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